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잃어버린 이름과 성장의 서사

처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봤을 때의 감정은 낯설고 묘했다. '애니메이션'이라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판타지'라기엔 지나치게 인간적이었다. 마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은 늘 현실과 환상이 경계를 부드럽게 흐린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단순히 어린 소녀의 모험이 아니라, '정체성을 잃은 인간이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10살 소녀 치히로가 부모님과 함께 이사를 가던 중, 우연히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인간 세계의 질서가 닿지 않는 그 곳에서 치히로의 부모는 탐욕으로 인해 돼지로 변하고, 치히로는 '유바바'의 목욕탕에서 일하게 된다. 유바바는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고 대신 '센'이라는 이름을 준다. 이 단순한 행위는 곧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인 '이름 = 존재'의 문제를 드러낸다.

이름을 잃는다는 건, 곧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긴 이들은 모두 그녀의 지배 아래서 정체성을 잃고 노예처럼 일한다. 하지만 치히로는 하쿠의 도움으로 자신이 원래 '치히로'였음을 기억하고, 그 기억이 그녀를 성장시킨다. 감독은 이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즉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성장의 본질임을 말하고자 한다.
시각적으로도 이 영화는 압도적이다. 컴퓨터 그래픽이 범람하던 시절, 손으로 그린 듯한 질감과 세밀한 배경 묘사는 아직까지도 다른 애니메이션에서 보기 힘든 밀도를 자랑한다. 유령과 신, 인간이 함꼐 뒤섞인 온천의 공간은 불결하면서도 따뜻하고,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현실적이다. 목욕탕이라는 공간 자체가 '정화'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치히로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한 모험이 아닌 '정화의 의례'로 읽힌다.


하쿠와의 관계 또한 영화의 정서를 깊게 만든다. 하쿠는 치히로를 돕지만, 그 역시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긴 존재다. 그가 본래 '가와나시 강의 신'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또 한 번의 해방을 맞는다. 치히로는 하쿠의 진짜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를 구하고, 동시에 자신 역시 이름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이 장면은 단순한 구출극이 아니다. 서로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즉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관계의 회복이자 성장의 완성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어른을 위한 동화'로도 읽힌다는 것이다. 탐욕, 소비, 무책임함으로 상징되는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치히로만이 순수함을 잃지 않는다. 쓰레기처럼 버려진 강의 신이 온천에 들어와 오물을 토해내는 장면은, 현대 사회가 환경을 파괴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은유적 경고처럼 느껴진다. 결국 신들의 세계는 초현실적이지만,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현실을 반영 한다.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여백이 영화 전반에 깔려 있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연출, 인물의 감정보다는 공간의 공기로 전해지는 정서,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들의 미묘한 울림. 치히로가 다리를 건너며 두려움을 억누르고, 하쿠의 손을 꼭 쥐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의 성장과 용기를 보게된다. 이처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대사를 줄이고 시선과 움직임으로 감정을 그려낸다.
엔딩에서 치히로가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올 때, 그녀의 표정은 영화 초반과는 다르다. 두려움과 불안을 가득 안고 있던 어린 소녀는 이제 조용히 앞을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서지만, 그녀의 걸음은 단단하다. 유바바의 세계에서 이름을 되찾은 치히로는 결국 현실에서도 자신의 잃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 영화가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자신을 잃고 사는 현대인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자키 하야오는 성장이라는 주제를 철학적으로 풀어내면서도, 어린이의 시선으로 그것을 순수하게 담아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결국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요?"
우리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이 영화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한다.
"당신이 자신을 잊지 않는다면, 어떤 세계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